무제 _ ep. 첫만남
강기린
2021.07.25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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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만남
퇴사를 앞둔 시기었다.
땡땡이 치는 날.
그날은 엄마가 한 행사에서 상 받을 일이 있어서 에스코트를 맡았다.
슬리퍼 질질 끌고 출근하던 평소와 다르게 자켓에 구두를 신고 집을 나섰다.
화장까지 했다.
엄마에게 전해줄 꽃도 샀다.
기분이 안 좋을 이유가 없는 날이었다.
그는 휴일이었다.
그가 말했다.
"아침햇살 사줄까?
몇일전부터 촌스럽게 아침햇살이 먹고 싶다고 했었다.
"응응!!!!!"
그냥 편의점 쿠폰을 기대했던 나는 신나서 좋다고 대답했다.
"문에 걸어두고 갈테니까 행사 다녀와서 먹어"
"......응?"
밤 산책을 좋아하지만 무서워해서 혼자 걸을 때 통화를 자주 했다.
그리고 내가 갑자기 연락이 안되면 얼른 신고해달라고 했었다.
그는 무서워하는 날 위해 로드맵으로 내가 걷는 길을 봐주곤 했다.
그런 그가 무작정 집을 찾아올 작정인거다.
그가 궁금하긴 했지만, 내 대나무숲이 없어지는 건 싫었다.
그의 얼굴을 보면 이제 편한 이야기가 오고갈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도 그가 온다고 한다.
만나고 싶지 않으면서도 먼길을 오는 그가 맘이 쓰였다.
"오면 저녁이라도 먹고가"
온다는 말이 믿기지 않아서 계속 되묻기도 했다.
"온다는거 뻥이지?"
"일단 이제 되돌릴 수 없어"
"뭐야 기차탔어?"
"기차여행 재밌네"
얼마뒤 그는 도착했고 실시간으로 우리동네 사진을 찍어보내왔다.
나는 그가 우리동네에 있다는 사실과 끝나지 않는 행사 때문에 발을 동동 굴렀다.
다행히 행사는 오래 걸리지 않았고, 광화문 9번출구에 앉아서 그를 기다렸다.
그는 굳이 다른 출구로 나와서 놀래키려고 했지만, 나는 그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의 샛노랗게 탈색된 머리는 오후의 광화문에선 흔한 머리색이 아니었다.
그와 나는 눈이 마주쳤고 웃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는 나를 지나쳐 걸어갔고, 그런 그를 잰걸음으로 따라갔다.
그는 매고 온 크로스백을 두손으로 꼭 잡고 나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걸었다.
중간중간 내가 앞을 보고 걸으면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우리는 나란히 삼청동길을 따라 걸었다.
가을의 삼청동길은 은행잎으로 온통 노랗고, 발밑은 은행지뢰로 가득했다.
나는 이리저리 인도와 차도를 오가며 은행을 피해다녔다.
멀리서 차가 오고, 그가 갑자기 내 팔을 당겨와서 나는 인도로 올라왔다.
그리고 인도 안쪽으로 나를 더 잡아당기고는 내 손을 잡으면서 다정하지만 힘있게 말했다.
"위험하니까 인도로 걸어. 인도로"
눈도 못 마주쳤으면서...
손 닿을까봐 매고 온 가방에 두손얹고 힘주고 잡고 걸었으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나는 말을 잃었고, 그는 벙어리가 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어색하게 앞을 보고 걸어나갔다.
"...북촌 처음이랬지? 저기 올라가자."
높은 곳에서 보는 북촌을 보여주려고 계단을 올랐다.
오랜만의 구두로 허리도 아파오고, 점점 숨이 차올랐다.
앞서걷던 내 걸음이 늘어지는 걸 눈치 챈 그는 물었다.
"힘들어?"
내 대답이 그에게 닿기전에 그는 손을 내 허리에 얹어 밀어주었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멈칫했지만 이내 계단을 오르기 편해짐을 느끼면서 그의 손에 살짝 무게를 더했다.
계단을 다 오르니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지는 해를 찍고 그는 뒤에서 나를 찍고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미리 찾아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제대로 된 첫 끼니에 난 허겁지겁 먹기 바빴다.
음식이 앞에 있으면 항상 맘이 급해서 숟가락이 입에 들어오기 전에 한껏 입을 벌려 먹는다.
한껏 입을 벌렸을 때 그와 눈이 마주쳤다.
"왜?"
머쓱함에 되물었다.
"그냥, 잘 먹는게 보기 좋아서"
그는 식사하는 중간중간 미소를 머금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평소 느끼지 못했던 시선이 신경쓰였지만 음식앞에서 그건 무시할 수 있었다.
만족스런 식사를 마치고 우린 북촌을 내려와서 인사동을 지나쳐 청계천으로 내려왔다.
그와 나는 이제 어깨가 닿아도 손을 잡아도 어색하지 않았다.
편해진 그는 청계천을 따라 걷는 내내 장난을 쳐왔다.
내 뒤를 따라오며 간지럼 태울 기회를 노렸고, 나는 피하는 대신 그를 향해 휙하고 돌아섰다.
간지럼을 태우려던 그의 손은 내 허리에 잡았고 나와 그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보게 되었다.
반격을 위해 그의 어깨로 손을 뻗었고, 그는 도망갔다.
순진한 그에 비하면 음흉한 내가 한수위였다.
장난은 좋아했지만 쑥쓰러움은 많고, 쑥쓰러움은 많지만 본인이 대담하다는 걸 모르는 그였다.
이게 우리의 첫만남이였다.
P.S
청계천에서 집앞까지 우리는 계속 걸었는데, 사실 그때 기억은 ‘너어무 힘들다’ 였다.
오랜만에 신은 구두로 허리도 발도 아팠는데, 너무 걸어서 다리도 아프고..
걷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벤치만 보이면 앉았다.
생각해보니 힘들게 만든 그에게 뿔이나서 물었었다.
"나는 너무 힘들어서 버스든 택시든 계속 타자고 했었는데 너는 왜 계속 걷자고 했어??"
"헤어지기 싫어서"
"//ㅇㅁ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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